아이들의 눈은 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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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여름에 들었던 어느 대학 특수교육과의 모교수님의 경험담입니다.

나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딸아이는 현재 만5세이고 유치원을 다니고 있다. 내가 특수교육을 가르치는 교수이기에 우리 딸이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라나게 하기 위해 통합유치원(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이 함께 다니는 곳)에 보냈다.

딸의 생일이 다가왔다. 평소에 잘 챙겨주지 못하는 편이여서 생일파티를 잘해주려고 친구를 초대하게 했다. 마음에 들거나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모두 초대하라고 말하고 아이가 하는대로 놔두었다. 생일 전날 어떤 친구들을 초대했는지 궁금해서 딸에게 다가갔다.

"설희(가명)야. 내일이 생일인데 어떤 친구들 초대했는지 엄마가 궁금한데 말해줄래?"

"응.. 누구랑 누구랑 누구랑 누구랑... 유진(가명)이랑 불렀어"

가끔 딸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었기에 대부분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이라는 아이는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아서 몇가지를 물어봤다.

"유진이라는 애는 엄마가 잘 모르겠는데 설명 좀 해줄래?"

"엄마. 유진이 몰라? 전에 엄마가 유치원에 놀러왔을 때 봤잖아."

"그래.. 그런데 생각이 안나네. 유진이는 어떤 아이야?"

"엄마는 그것도 몰라? 유진이는 노란옷을 좋아하고, 햄토리 좋아해. 그리고.. 음... 웃을 때 진짜 이뻐. 근데 비오는 거는 무지 싫어해. 나도 비오는 거 싫은데 유진이도 싫어해서 참 좋아. 그리고 유진이는 요쿠르트 좋아하고.. 또 뭐있더라?"

그래도 도저히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딸에 대해 내가 이렇게 관심이 없었나 하는 자책감이 들 정도로...

"그리고.. 유진이는 유치원에 맨날 엄마랑 같이와. 다른 애들은 유치원 버스타고 오는데 유진이는 버스 안타고 지네 엄마차로 맨날 같이 온다."

"그래 유진이네 집은 멀리 있나보구나."

딸이 다니는 반의 아이들을 대부분 알면서도 이 때까지는 진짜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딸에게 그냥 아는 척하는 게 딸아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같다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맞다. 유진이는 바퀴달린 의자타고 다녀"

이런... 이런... 그래 딸의 반에 있던 지체장애 아동의 이름이 유진이었던 것이다. 나에겐 유진이라는 아이가 단지 "지체장애"를 가진 아이로 가장 먼저 다가오는데 우리 딸에게는 그런 건 사소한 특성일 뿐이었던 것이다. 장애인을 대할 때 장애를 먼저 보지 마라라고 가르치는 내가.. 그런 내가 실제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장애를 가장 먼저 봤던 것이다.

"설희야. 이제 엄마도 유진이가 누군지 알 것같아. 늦게 알아서 미안해"

"엄마 괜찮아. 대신 내일 맛있는 거 많이 사줘야 돼"

"응 그래..."

만화를 본다며 거실로 뛰어가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혼자 소리없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아 조금 각색했습니다. 그리고 장애아동을 볼 때 장애를 가장 최우선 요소로 보는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고민꺼리로 머리 한 구석에, 마음 한 켠에 남아있네요. 점점 더 열심히 고민하면서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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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6 13:44 2007/01/16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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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싸인펜 2007/01/16 15:17

    아아.. 글을 읽고나니 무언가 느껴지는게 있습니다.
    좋은 글이네요.

    • 라온수카이 2007/01/19 13:56

      특수교육을 배운다는 거,, 처음에는 '애들만 잘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제 의식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인성교육이 된답니다. ㅎ

  2. 토시리 2007/01/16 16:01

    이런, 찔끔하게 만들어 주는 이야기이네요.. 더 신경 쓰고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들 자체가 이미 선을 긋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반성합니다.

    • 라온수카이 2007/01/19 13:57

      '자연스러움'이 중요한데 어릴 때부터 워낙 분리교육(장애아동 따로 비장애아동 따로...)을 받아와서 저 아이의 반응에 부끄러워지더군요.

  3. 루돌프 2007/01/16 17:52

    이런거 보면....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는 좀 삐딱했던 녀석같습니다..ㅋ

    • 라온수카이 2007/01/19 14:03

      여중생폭력사건이나 화성 연쇄살인같은 것을 보면 아마 "거봐 내 말이 맞지?"라고 하면서 낄낄댈겁니다... 악한 사람도 많은 세상인지라...

  4. 아르 2007/01/16 18:18

    인터넷 속도가 느려서, A/S기사를 불렀었는데 장애인 기사분이 오시더군요.
    요즘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많이 개선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라온수카이 2007/01/19 14:04

      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변해야죠.. 남들은 몇백년에 이룩한 일을 몇십년만에 이룩했다면서 '한강의 기적'이니 뭐니 하는 거.. 절대 좋은 게 아니죠..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천천히 발전해야 건강한 사회가 될테니까요..

  5. 하늘달빛 2007/01/16 20:58

    왠지 '어린왕자' 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 라온수카이 2007/01/19 14:06

      어린왕자가 지금 우리나라를 방문한다면 양이고 나발이고 신경 안 쓰고 B612로 돌아가버릴 것같네요.. ㅎ

  6. 마래바 2007/01/17 08:01

    그러네요. 아이의 눈에는 신체장애는 그저 작은 한가지 특징에 불과했던 것..
    그보다 그 아이를 나타내는 다른 특징을 더 많이 알고 인식하고 있으면서 신체장애는 그 특징 중에 하나였던 것이군요.
    조금 생각하게 만드는군요.
    어쩌면 성장한다는 것이 점점 물들어가고 세상과 타협해져 간다는 걸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라온수카이 2007/01/19 14:10

      저 아이의 반응이 당연한 것인데, 당연함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마도 제가 살아오면서 사회에 적응해 나가면서 저런 면을 많이 버려온 것같습니다. 그레텔이 버린 빵처럼 흔적조차도 없어져버린 것같이 말이죠..

  7. 무소누님 2007/01/17 15:04

    규식씨아이들은 참 행복하겠네...
    언젠가 상호씨랑 두어시간 차를 마시는데
    우리 둘째녀석은 점자를 읽는 상호씨를 신기한듯 살피더니
    "엄마, 사투리 아저씨는 눈이 손으로 숨었나봐~~!" 하더라구요.
    우리아들...곱지요...ㅎㅎ
    모든 아이들은 다 그래요.
    그 아이들이 초,중 고를 지내도 그러다 어른이 되어도
    그맘 여전히 곱도록 도와주는 그런 선생님,부모님이 되자구요...

    • 라온수카이 2007/01/19 14:12

      그 '사투리 아저씨'랑 요즘 점심 저녁을 매일 같이 먹는데, 이 이야기를 한번 해봐야겠네요.ㅎㅎ
      곧 승현이랑 무쏘 한번 가겠습니다. 누님~ ^^

  8. Xeonia 2007/01/18 12:17

    '생각해보면 안경을 쓰고 있는 저도 신체장애를 겪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안경이 없으면 한치앞도 보기가 힘드니까요.'
    ...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많은 반성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 라온수카이 2007/01/19 14:14

      정규분포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사람이고 사회인데, 우리는 항상 흑백논리 속에 빠져 있죠.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는 질문에 "아빠", 혹은 "엄마"라는 대답을 원하지 "아빠가 조금 더 좋긴한데 엄마도 좋아"라는 대답은 그냥 흐릿한 대답으로만 생각을 하니까요.. ;;

  9. 보드라우미 2007/01/19 00:50

    많은 걸 느끼게 해주는 글이네요.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서 보지 말고, 그 사람 전체를 볼 수 있으려면, 아이의 눈을 가져야겠네요.
    사람끼리 친구가 되면 그 사람의 내면과 장점, 여러 특성을 보게 된다지요.
    친구가 되기 전에는 외모라든가 장애 같은 일부 특성에만 주목한다고 하더라구요.
    얼마나 마음을 열고 다가가고 친구가 될 수 있느냐가 관건일 듯 하네요.

    • 라온수카이 2007/01/19 14:16

      아무리 개쓰레기라 불려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장점은 있고, 그 누구나 칭송해 마지않는 사람에게도 단점은 있죠. 후광효과에 빠져들지 말고, 성급한 일반화를 하지 않으며 살아야 할텐데.. 참 힘든 일이긴 하죠...

  10. yume 2007/01/19 10:0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깊은 생각을 하게하는 글이군요.
    덕분에 잠깐이나마 저 자신에 대해 반성해 볼 수 있었습니다.

    • 라온수카이 2007/01/19 14:17

      잠깐의 반성이 가슴 한 켠에 작은 열매로 남아 있길 바랄께요. ^^

  11. 찬욱 2007/01/19 15:38

    가슴 한 켠을 따뜻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이런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아마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라온수카이 2007/01/24 13:29

      특수교육을 배워서 이젠 아이들 앞에 설 날이 머지 않았는데, 저는 아직도 준비되어 있지 못한 것같아서 제 자신을 더 채찍질하게 되네요. ^^;

  12. 좀비 2007/01/24 08:04

    아. 정말 맛있는 것 많이 사줘도 될 딸인것 같네요.. 우리 딸아이도 저런 모습으로 자라나야 할 터인데.. 역시 그러려면 제가 먼저 솔선수범 해야겠죠? ^^

    • 라온수카이 2007/01/24 13:31

      어른은 아이들에게 배워야 할 점이 있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같습니다. 아이들의 반응과 변화에 맞게 잘 가르쳐주세요. ^^

  13. 민부 2007/02/11 02:46

    형 많이 생각하고 가요

    • 라온수카이 2007/02/12 14:04

      생각한 만큼 실천에 옮기길.. ^^

  14. phystuo 2007/05/16 21:28

    너무 훌륭한 글입니다. 왠지 스크랩 하고 싶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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